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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라이프/부다페스트 일상

주간 일기 : 12월의 둘째 주

by _oneday_ 202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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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기침이 낫지를 않는다. 집이 너무 건조해서 회복이 더딘 것 같은데 가습기를 사야 하나. 일 끝나고 집에 갔는데 남편 책상 옆에 모르는 박스가 보여서 이거 뭐야? 하니까 나는 만지면 안 되는 비밀이란다. 바로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 이벤트가 뭔지 모르는 0101010101 공대남... 작년에도 떡하니 보이는데 두고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비밀이 이렇게 나와 있으면 왜 비밀이냐고 서프라이즈의 뜻을 몰라...?라고 작년에도 말했었는데. 그래도 이런 것 마저 숨기지 못하고 간단한 거짓말조차 못하는 남편이 좋다. 


2024.12.10

남편이 추천해준 기침에 좋은 허브 꿀 시럽. 진짜 이거 효능 괜찮다! 맛은 술맛 안나는 예거 맛.

드디어 청첩장 송부를 시작했다. 영국, 이탈리아, 한국, 네덜란드... 어쩌다 보니 엄청 글로벌해짐. 다들 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정성을 담아 보냈다.

개인적으로 너무 어수선 한 날이었다. 10년 간 4개국을 옮겨 다니며 1년 뒤, 6개월 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다가 헝가리에 와서야 한 도시에 살며 한 회사에서 꾸준히 근무도 하고 (심지어 이사도 한번 안 갔다.) 몇 안되지만 이제야 정말 믿을 만한 친구도 생기고 남편도 생겨 1년, 2년은 물론 4년 5년 뒤의 모습까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왔는데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발전은 멈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는 변화에 익숙하고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정작 생각해 보면 헝가리에 오고 나서는 그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안정 속에서도 스스로 발전은 할 수 있는 것인데 그저 편안함에 취해 있었다. 지금이라도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4.12.11

먹고 싶던 감자탕을 먹었다. 우거지가 맛있었다. 골뱅이 소면도 맛있었는데 골뱅이가 엄청 컸음.

사람 인연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었다. 인연과 관계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동물이라 타인과 관계를 꼭 맺어야 하는데, 그 관계가 어떤가에 따라 넘치는 행복을 경험할 수 도 있지만 엄청난 절망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 무섭기도 했다.


2024.12.12

변화 무쌍한 날들이다. 며칠 전 마음먹었듯이 나름 공부를 하는데 머리가 잘 도와줬으면 좋겠다. 일 끝나고 남편이랑 멀드와인을 한 잔 하고 왈츠를 배우러 갔다. 살다 살다 내가 왈츠를 다 배우고 웃기네. 완전 몸치인데 나름 감이 잡히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벌써 12월 중순이다. 집 밖에 나가보면 크리스마스, 연말 느낌이 잔뜩인데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매일매일 직장, 결혼식 준비, 집 준비 등... 중간중간 좁은 인간관계도 챙겨야 하고 남편과 시간도 보내야 하고 하던 운동도 해야 하고 매일 기절하듯 하루를 마무리한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고 생각한 지 몇 년이 된 거 같은데 앞으로도 그런 날이 없을 것 같다. 


2024.12.13.

 


드디어 헝가리어 청첩장까지 도착해서 한시름 놓았다. 퇴근하고 운동하고 남편이랑 같이 청첩장 작업을 했다. 인원보다 많은 수를 제작 해서 한 집에 두 명 세명이면 두 장씩 세장씩 넣었다. 이게 맞나 싶지만 초대하는 사람 맘이다. 헝가리에서는 누군가를 초대한다고 해서 가족이나 배우자, 연인을 맘대로 데려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신랑 신부가 초대할 때 가족/배우자도 같이 와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청첩장 작업하면서 꼼꼼히 보니 약간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이 셀프의 매력이 아닌가. 다들 기쁘게 받아 주었으면 했다.


2024.12.14

 

다시 돌아온 일토의 날. 원래 재택을 하려고 했는데 출근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아 출근하고 말았다. 주말부부를 하는 남편이 한 달이나 집에 와 있는데 토요일까지 일하러 가는 것이 미안했다. 가끔은 내 출근을 아쉬워 하는 남편이 꼭 아들 같아 이것이 워킹맘의 심정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포기하고 집을 보고 왔다. 이래저래 조건에 맞는 집을 찾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나랑 남편 간 의견 차이는 적긴한데... 너무 선택권이 없다. 결혼 준비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누군가 딱! 여기 네 집이 있어! 여기 네 결혼식이 준비 되었어!^^하고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동화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 끝나고는 다른 드레스 샵을 가봤다. 친구가 기분 나라고 무알콜 샴페인을 준비해줬다. 감동. 부다페스트에 5년째 살고 있지만 친구들에게 드레스 샵에 같이 가자고 하기 미안하다. 아니 친구 시간 뺏는 걸 떠나서 여기는 친구 앞이라지만 속옷 바람으로 세워놓고 드레스 고르고 입고 벗고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여하튼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찾았는데 집에 와서 보니 또 별로인 거 같아서 고민에 빠졌다. 진짜 누가 이 드레스가 너한테 최고야!라고 정해줬으면 좋겠다 진짜.


2024.12.15

늘어지게 자고 늦은 오후에 브런치를 했다. 감기 걸린지 2주가 되었으니 다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다시 몸이 안 좋기 시작했다. 몸살인 건지 운동으로 인한 근육통인지 헷갈릴 지경. 브런치 집에서는 레몬 진저 티를 때려 넣고 감기약도 때려 넣으니 버틸만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느 정도 준비해 놔야 다음 주에 보완이 될 거 같아서... 첫 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 할 때는 진짜 너무 몽글몽글 하고 따뜻하고 좋았는데 삼 년 차 밖에 안 됐음에도 크리스마스 선물 고민하는 게 스트레스가 되어 버렸다. 쇼핑 센터에 갔다가 현지 주류점에서 한국 소주를 봤다. 지금 생각하니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몇 개 살걸 그랬다.

 

올해 헝가리 크리스마스 연휴가 화요일부터 주말까지 6일간 이어지기 때문에 다른 한국인들은 다들 여행 가기 바쁜데 헝가리인이랑 결혼한 나에게는 그냥 명절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시댁 가족 방문 계획을 세우고... 세상 쿨할 것만 같은 유럽에서도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느 쪽 집에 먼저 갈지 얼마나 지내고 올지를 두고 부부싸움이나 고부갈등이 생기곤 한다. 나는 남편 스케줄에 모든 것을 맞춰주니 그럴 일이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에게 얼마나 행운이냐며 생색을 내었다. 

저녁까지 외식. 몇 달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임박해서 예약 하려면 항상 풀북이라 3주(!)나 일찍 예약해서 갈 수 있었던 Mazel Tov. 웨이팅 하는 팀도 꽤 있고 왜 이렇게 인기인지 궁금해서 가봤는데 음... 분위기가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음식도 뛰어난 게 아니라 왜인지 모르겠다. 호박수프는 맛있었지만 후무스와 양고기는 너무 짰고 남편이 시킨 오리고기는 조금 질겼다. 한번 가봤으니 됐다 싶은 곳.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오래 붙잡고 있는 책,  '쥐'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

 

"I'm not talking about YOUR book now, but look at how many books have already been written about the Holocaust. What's the point? People haven't changed...Maybe they need a newer, bigger Holocaust."(네 책 이야기가 아니라, 봐라, 벌써 얼마나 많은 홀로코스트 책들이 나왔니? 대체 의미가 뭐야?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어. 아마도 그들은 더 새로운, 큰 홀로코스트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지 80년, 이 책이 쓰인지 30년이 넘었는데 그 이후로 세계가 돌아가는 바를 봐도 너무 맞는 말이다. 계속해서 홀로코스트, 어두운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별개로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와 비슷하거나 같은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다. 

 

집에 와서는 넷플릭스로 남편 한국 현대사 교육 목적으로 서울의 봄을 봤는데 그렇게 총격전이 있었다는 건 나도 몰랐다. 그런 역사가 있었는데 계엄령을 시도한 것만 봐도 모든 사람들이 과거를 교훈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명이라도 과거를 잊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슬픈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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